연블락 재테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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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013년 말에 군대를 전역하고, 휴학을 해야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시골에 집을 짓기로 했기 때문에, 저까지 대학교를 가기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돌이켜보면, 한국장학재단의 국가장학금 수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들어가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서라도 휴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습니다.

 

그래도 휴학을 하며 사회의 여러경험을 해보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일을 하게 된다면 돈을 많이 벌수록 좋겠지만, 무언가 배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공대를 다니면서 당시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대생의 최종 종착지는 치킨집 창업이라는 우스개 소리처럼, 결국은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본인 사업을 해야할 때가 찾아옵니다.

아시다시피 월급쟁이가 퇴직금을 가지고 소규모 자영업을 할 경우, 성공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직장생활을 15-20년 동안 하신 분들이, 사업자의 마인드로 훌륭한 음식을 좋은 서비스와 함께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먼 미래이지만, 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저는 자영업 및 사업에 대한 관심은 어릴 때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규모가 큰 사업장을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이러한 생각은 제가 편의점, 피시방, 주유소 알바 등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유로 이어집니다.

해당 알바를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찍은 베네치아 사진

2. 숙식제공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알바천국에 있는 수 많은 공고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최우선 순위로 삼았던 조건은 '숙식제공'이 였습니다.

특히, 숙소제공은 꼭 필요했습니다.

이유는 저희 집이 하루에 버스가 2시간에 1대 오는 시골이여서, 알바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서울에서 숙소제공이 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숙식을 제공해준다? 이는 전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업무난이도가 높고, 집을 나와서 일을 하러 온 것이라서 무작정 도망가기가 어렵습니다.

숙식을 제공해줄 곳에 일을 하러 갈정도면, 돈이 중요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일을 하면서 추노하는 분들을 여럿 봤습니다.

새벽에 짐을 싸서 나간 부사관 출신 형도 있었고, 점심 손님 끝나고 나서, 숙소에서 짐싸고 나간 분도 있었습니다.

직접 찍은 이탈리아 부라노 사진

3. 산들해 일 시작(스케줄)

한식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13년 12월 1일부터 였습니다.

11월 말에 면접을 보고 캐리어에 짐을 싸온 뒤, 12월 1일부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한식집은 양재역에 있는 '산들해'라는 식당으로, 규모가 꽤 큰 식당이였습니다.

산들해는 양재역 9번 출구 엘타워 지하 1층에 식당이 위치해 있었고, 숙소는 양재역 8번 출구에 있는 약 5-6평 되는 원룸이였습니다.(숙소와 직장은 도보 약 5-10분 거리)

참고로 해당 빌라 원룸들은 둘이서 같이 지내야 했었습니다.

(약 6개월 동안, 3명의 룸메이트와 지냈었네요..ㅎㅎ) 

 

업무시간은 09:30 - 21:30으로 12시간이였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아래 일정입니다.

 

1. 09:30 - 11:00 식당 오픈 준비

2. 11:00 - 15:00 점심 영업

3. 15:00 - 17:00 점심식사 및 저녁 영업 준비 + Break time(15시 직전에 손님오면 Break time 없어집니다.)

4. 17:00 - 20:00 저녁 영업

5. 20:00 - 21:30 저녁 마감

 

휴무는 주말 제외 하고 평일에 월 4회 휴무였습니다.

 

지금 봐도 아주 살인적인 스케줄입니다.

사실 자영업 하시는 분들이 이러한 스케줄들을 소화하시지만, 이 한식집의 근무강도는 정말로 상상 그 이상입니다.

근무강도에 대해 제가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1. 부사관 출신 형님이 한 달 일하고, 새벽에 짐싸서 나갔습니다.

2. 짐싸서 온 20대 초반 친구가, 오전 일 하고, 숙소가서 짐싸고 집에 갔습니다.

3. 주방이모들은 3-4명 제외하고, 모두 조선족 이모들이였습니다.

 

조선족이모들은 여기서 받는 월급이 중국에서 받는 급여의 4-5배 이상이였고, 모두 본인 동네에서 건물주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저희가 현재 월급 200만원에서 외국으로 가서 똑같은 노동을 할 떄 1000만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몸을 갈아 넣어서라도 일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 홀 인원 8명 기준으로 제가 6개월 동안 일하면서 마주친 인원이 최소 30명입니다.

1년 일하고 퇴직금을 받은 뒤 나간 선배들이 있어서, 제가 4개월 차에 매니저님 바로 밑의 짬밥이 되어버렸습니다.

홀에서 1년 이상 일한 사람은 매니저밖에 없었습니다. 매니저가 본인 포지션 유지하기 위해 형님들을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직주 근접이라서 출퇴근 시간이 거의 없었던 점은 장점이였지만, 근무강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월급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근로자계약 할 때도 중간에 Break time을 4시간을 집어넣고, 실 근무시간을 8시간만 넣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당계약이였는데, 숙소를 제공받는 근로자가 이에 대해 컴플레인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당시 최저시급 5,210원인 것을 감안하면, 월급 180만원이 적은 금액은 아니였지만, 숙소제공 10만원 제외 및 보험비용 제외시 실수령액은 165만원 정도였습니다.

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참고 견뎠던 것 같습니다.

 

 

글이 길어져서 다음 편은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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